거인들의 시대
 |
|
|
|
|
|
▣『막스 플랑크 평전』 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두 번의 세계대전과 나치의 공포정치라는 서구 역사 중 가장 급박하고 가장 모순적이며 가장 참담한 시기를 살았음에도 가장 위대한 과학 연구소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막스 플랑크.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지부를 찍은 원자 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으나 핵전쟁을 막기 위해 정보 공유의 중요성을 강조한 순간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려 버린 비운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두 물리학자의 인생을 통해,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자세를 배운다.
▣ 기획 : APCTP(아태이론물리센터 / 웹진 「크로스로드」), 사이언스북스
* 책 대 책이란?
한 권의 책을 내용 중심으로 소개하던 일반적인 서평 쓰기에서 벗어나 물리학의 역사에서 이정표 역할을 했거나 물리학을 대중화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책들을 중심으로 인물 대 인물, 이론 대 이론, 이론 대 현실(혹은 상상), 명강의 대 명강의 등 두 권의 책을 비교분석하는, '희망의 인문학 캠페인'의 새 코너다.
|
|
|
|
 |

|
막스 플랑크 평전
에른스트 페터 피셔 저/이미선 역 | 김영사
엔트로피, 불확정성 원리, 시간여행, 평행우주를 이해하려면 막스 플랑크부터 알아야 한다. 근대에서 현대로 가는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전환점을 만들며 현대 물리학의 시작을 만든 막스 플랑크. 이 책은 새로운 20세기를 연 과학자 막스 플랑크의 평전으로, 해박한 인문학 지식을 갖춘 저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저술하였다. 가족을 잃는 등 개인으로는 누구보다 불우한 삶을 살았지만, 과학자로서는 최고의 명예로운 삶을 산 막스 플랑크의 생애과 업적을 조망한다. |
|
|
확실한 세계를 믿는 과학자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과학자에게 조국이 있을까?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의 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가 2년 전 프러시아의 본 대학에서 받은 명예박사학위를 반납하면서 한 유명한 말이다.
양자역학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막스 플랑크(1858~1947)는 어땠을까? 생전에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는 것을 목도하고,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고, 나치 치하에서 카이저 빌헬름 협회 의장으로서 독일의 물리학을 지키고 대변했던 그에게 과연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독일 콘스탄츠 대학 과학사 교수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2007년에 낸 막스 플랑크의 평전은 한 명의 물리학자가 극심한 혼란 속에 있던 세계 속에서 자신의 확실하고 분명한 세계를 지키려 했던 모습을 너무나 절절하게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피셔가 이 책의 원제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와 세계의 붕괴”로 한 것은 Der Physiker (The physicist)로서의 플랑크를 통해 19세기까지의 고전적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점을 역설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물리학, 수학, 생물학, 과학사를 모두 전공한 피셔는 『또 다른 교양, 교양인이 알아야 할 과학의 모든 것』,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 『망델브로 나무 위에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과학을 배반하는 과학』 등 70여 권의 저서를 쓴 탁월한 저자이기도 하다. 피셔가 플랑크가 세상을 떠난 그 해에 태어났다는 점이 의미심장해 보이기도 한다.
플랑크 평전이 처음 나온 것은 아니고, 다음의 책들이 있다.
● 한스 하르트만 (1948). 인간으로서 그리고 사상가로서 막스 플랑크
● 막스 플랑크 (1948). 과학 자서전과 막스 폰 라우에의 추도사
● 발터 게를라흐 (1948). 양자이론, 막스 플랑크, 그의 업적과 작용
● 헤르만 크레츠슈마르 (1967). 철학자로서의 막스 플랑크
● 아르민 헤르만 (1973). 막스 플랑크, 자기증언 기록과 사진 자료들
● 존 하일브론 (1986/2000). 막스 플랑크, 한 양심적 과학자의 딜레마
● 막스플랑크협회 (2001). 막스플랑크, 강연-연설-기록
● 장 클로드 부드노, 질 코엥 타누지 (2001). 막스 플랑크와 양자
● 아스트리트 폰 푸펜도르프 (2006). 플랑크 일가, 애국심과 저항 사이에 있던 가족 이야기.
● 디터 호프만(2008). 막스 플랑크와 현대 물리학의 발전
이 중 미국의 과학사학자 하일브론의 평전은 1992년에 정명식과 김영식의 번역으로 한국어판이 나왔으며, 2010년에 나온 피셔의 책이 두 번째 한국어판이다. 원제가 “막스 플랑크와 독일 과학의 운명”인 하일브론의 책은 순수함과 정직을 생명으로 여기던 카이저 빌헬름 협회의 의장이 격동의 시기에 과학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지만, 아쉽게도 90년대 이후 발굴된 새로운 사료들을 통해 더 생동감 있게 알 수 있는 플랑크의 모습을 2쇄 후기에 짧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피셔의 평전이 더 빛을 발한다.
막스 플랑크의 이름이 과학사에 굳게 새겨진 것은 1900년에 흑체복사의 올바른 공식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플랑크가 제시한 에너지의 작용양자(Wirkungsquantum)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둘러싼 과학사학자들의 견해는 갈려 있다. 물리학 교과서에 흔히 등장하는 입장에서는 1900년에 이미 플랑크가 미소물리학적 실체들의 에너지는 특정의 띄엄띄엄 떨어진 값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도입했다고 본다. 여기에는 1919년에 초판이 나온 뒤 양자이론의 보급에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아르놀트 조머펠트의 교과서 『원자구조와 분광선』의 영향이 컸다. 조머펠트는 “플랑크가 진동수가 인 복사에너지는 기본 에너지 양자 의 정수배로만 방출 또는 흡수된다는 에너지 양자의 가설을 제안했다”라고 쓰고 있다.
토머스 쿤은 1978년에 출판된 『흑체이론과 양자불연속, 1894-1912』에서 막스 플랑크의 에너지 양자화 가설을 양자이론의 탄생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플랑크가 에너지의 양자화를 얻었던 것은 순전히 고전열역학의 맥락에서였으며, 플랑크 자신은 1900년 무렵에 (심지어는 그 이후에도) 자신이 한 연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1906년에 플랑크의 가설을 실제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광전효과를 설명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나, 빛 양자 가설이 흑체복사이론에 어떤 본질적인 역할을 했는가를 설득력 있게 논의한 파울 에렌페스트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양자이론의 창시자라는 것이다. 여기에 동의하는 과학사학자들은 플랑크의 논문들 자체와 1948년까지 계속 나왔던 플랑크 자신의 강의록이나 회고록을 바탕으로 플랑크의 아이디어는 철저하게 고전적인 통계열역학의 맥락에서 제시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혁명적인 의미는 1908년 이후에야 비로소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즉, 플랑크는 동역학의 법칙들에 혁명을 불러일으킬 의도가 전혀 없었고 실제로 혁명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두 주장의 중간 정도로서, 플랑크는 자신의 공식이 큰 혁명을 부르리라는 것은 몰랐고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실제로 그 자신은 혁명을 가져 왔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래서 플랑크는 곧잘 혁명의 도화선과 상징이 되었지만, 혁명을 원하지 않았던 코페르니쿠스에 비견되기도 한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 생겨나 점점 더 힘을 얻어가게 된 양자역학에 대해 플랑크는 끝까지 불신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명한 “과학사의 플랑크 원리”가 등장한다. 과학의 역사에서 새로운 이론이 낡은 이론을 대치해 가는 것은 특별한 합리적 기준에 따른다기보다는 오히려 낡은 이론을 믿는 세대가 새로운 이론을 믿는 세대로 대체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플랑크가 양자이론의 실마리를 제공할 무렵, 영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톰슨(켈빈 경)은 이른바 ‘두 구름’을 말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기가 밝은 1900년 초, 톰슨은 물리학에 대한 전망을 말하면서 물리학자의 하늘을 아주 쾌청하며, 단지 마이켈슨-몰리의 실험과 흑체복사라는 작은 두 조각의 구름이 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플랑크 자신은 언제나 새로운 과학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과학을 잘 이해하고 다듬어 나가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의 구름이 20세기 물리학에 폭풍우를 가져온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그러나 더 비극적인 폭풍우는 전쟁이었다. 가족과 대학에 대한 의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던 플랑크에게 일차세계대전의 발발은 깊은 고뇌의 시작이었다. 피셔가 플랑크의 일생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면서 교수자격을 취득한 1880년까지를 첫 번째 시기로 나누고 다시 양자이론의 시초가 되는 1901년을 세 번째 시기의 시작으로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플랑크의 일생에서 1914년과 1945년이 시기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는 것은 격동의 역사 속에 살아가던 그의 삶을 잘 반영한다. 1913년 베를린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된 직후 일차세계대전이 터졌을 때에도 전쟁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과학과 학문의 발전만을 이야기하던 플랑크가 아돌프 폰 하르나크, 파울 에를리히, 에밀 피셔, 프리츠 하버, 펠릭스 클라인, 빌헬름 뢴트겐 등과 더불어 독일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독일의 군사적 행동과 정치적 목적에 동참한다는 “지식인 93인 성명”(Aufruf der 93 Intellectuellen)에 서명한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1930년 카이저 빌헬름 협회 의장에 취임한 플랑크의 남은 인생은 이 협회를 지키는 데에 바쳐진 것처럼 보인다. 종전 뒤 그 이름이 막스 플랑크 협회로 바뀐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었다. 1935년 카이저 빌헬름 협회를 위한 하르나크 하우스에서의 연설에서 세 번이나 망설이다가 간신히 오른손을 들어 “하일, 히틀러!”라고 인사해야 했던 플랑크는 그가 믿었던 세계에 대한 합법칙적인 원리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작거나 크거나 할 것 없이, 그 안에서 자연의 법칙들이 확고하고 일관성 있게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공동생활도 높든 낮든, 고귀하든 보잘것없든 모두에게 동일한 법칙을 요구합니다. ... 그러한 성향 안에서 프로이센과 독일은 위대해졌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모두가 이러한 성향을 보존하고 심화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할 성스러운 의무가 있습니다.”
피셔의 평전에서 플랑크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두 사람이 있다. 아인슈타인과 프리츠 하버이다. 1905년 출판된 아인슈타인의 논문의 가치를 알아본 첫 번째 물리학자가 바로 플랑크이고, 1913년에 아인슈타인을 베를린으로 불러들인 장본인이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에게 강의의 권리는 있으나 의무는 없는 베를린 대학 정교수 자리, 프로이센 과학학술원 정회원 자리와 더불어 1912년 카이저 빌헬름 협회가 신설한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소장 자리를 제안했고, 플랑크가 카이저 빌헬름 협회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플랑크의 위대한 발견 두 가지가 바로 양자와 아인슈타인이라는 말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1918년에 막스 플랑크와 더불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일차세계대전 중에 군사용 독가스 개발의 책임자였고, “평화 시에는 인류를 위해, 전시에는 조국을 위해”라는 모토를 갖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일찍 기독교로 개종했고, 스스로를 명실상부한 독일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 치하의 나치에서는 그의 혈통이 더 큰 문제였고, 독일 화학의 자부심은 1914년 망명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앞에서 인용한 1935년의 플랑크의 연설은 다름 아니라 프리츠 하버의 서거 1년을 추모하는 자리였고, 피셔는 플랑크가 느꼈을 슬픔과 비분을 강렬하고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독일어에서 번역된 막스 플랑크의 평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만 몇몇 용어의 번역에서 오류가 발견된다. 사소한 것은 ‘보편함수’를 ‘우주적 기능’(p.91)으로, ‘최소작용의 원리’를 ‘최소작용의 법칙’(p.326)으로, ‘파동장’ 또는 ‘파동마당’을 의미하는 Wellenfeld를 ‘진동수 영역’(p.128)으로 옮긴다거나, 파장Wellenl?ge과 파동Wellen을 혼동(p.130)하는 것이다. 플랑크 상수의 값이 10-27이 아니라 1027로 되어 있는데(p.336), 이는 원문에서도 잘못 되어 있다. 진동수를 나타내는 그리스 문자 ν(뉴) 대신 υ(윕실론)이 사용된 것은 편집상의 중요한 오류이다. 플랑크 상수의 단위를 줄 초(J?s)가 아니라 줄(Js)이라고 표기하거나, “공간은 무한하지만 경계는 없다”(p.249)는 내용을 잘못 적은 것이나, “에너지와 시간 사이의 상보성”을 “보완성”으로, “닫힌 계”를 “완결된 계”(p.163)로 옮긴 것은 역자의 사소한 실수일 것이다.
플랑크가 처음 베를린 대학에서 자리를 얻을 때의 첫 직책이었던 Extraordinariat는 실험실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학과를 열거나 닫을 수 있는 권한을 지니는 정교수(Ordinariat)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는 독일에서 실험실을 따로 갖지 않았던 이론물리학자를 가리키며, 미국의 associate professor나 영국의 reader에 준하는 제도였으므로, ‘정원 외 교수’라기보다는 ‘부교수’라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플랑크가 과학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실재론(Realismus)의 문제를 여러 곳에서 ‘현실주의’로 옮기면서 한국어 독자에게 큰 오해를 주게 되었다(pp.185-7, 191-2, 286, 317 등). 플랑크가 젊을 때에는 감추어진 실재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더 중시 여기는 ‘현상론자’(p.102)였다. (현상론은 에트문트 후설이 제안한 철학적 ‘현상학’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의 플랑크에게 과학이론, 특히 물리학이론은 세계의 참된 모습에 대한 서술이며, 이는 현실에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때문에 잘못 보아서는 안 되는 실재(Realit?)이다. 그런 점에서 실재론자(Realist)인 플랑크는 현실주의적인 태도와 정반대에 서 있다.
막스 플랑크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일차세계대전 중에 전사한 첫째 아들과 히틀러 암살에 연루되어 1945년에 처형된 둘째 아들은 막스 플랑크의 인생에서 조국과 전쟁은 어떤 의미였을까?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과학자들에게 조국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원칙과 합법칙적 기준을 중시 여기면서 가족과 과학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 평생 애썼던 막스 플랑크에게 새로운 과학은 실재에 대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었을까?
서평자 / 김재영(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

|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카이 버드,마틴 셔윈 공저/최형섭 역 | 사이언스북스
제2차 세계 대전 승리를 향한 경쟁 속에서 태어난 핵무기는 이미 탄생 직후 엄청난 파괴력과 남용 가능성으로 인해 말 그대로 ‘폭탄’이 되어 왔다. 그리고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지휘자이자 ‘원자 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일생에 있어서도 극적인 순간들을 안겨 주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American Prometheus: The Triumph and Tragedy of J. Robert Oppenheimer)』은 저널리스트인 카이 버드와 영문학과 미국 역사학 교수인 마틴 셔윈 두 사람의 저자가 25년 동안 답사와 인터뷰, FBI 문서 열람 등 자료 수집을 거쳐 쓴 오펜하이머 일대기의 결정판이다.
|
|
|
원자 폭탄의 아버지라 불린 한 인간의 삶
아태이론물리센터의 청탁을 받아 준비하게 된 이 서평의 독자들은 대개 과학계 종사자들이나 과학 ? 특히 물리학 ? 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 물리학의 산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원자 폭탄의 “아버지”인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의 일생을 다룬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짝을 이룬 책이 고전 물리학을 넘어 현대 물리학의 시대를 연 막스 플랑크의 평전이니, 적어도 기획자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 양자 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과 미국에서 그것을 대규모 파괴력으로 실현한 인물. 흥미롭지 않은가?
하지만 처음부터 초를 치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공저자인 마틴 셔윈 (Martin J. Sherwin)은 자신이 과학사학자로서는 매우 약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셔윈 교수가 올해 4월 잠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마치고 저녁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어떻게 오펜하이머에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정할 무렵 가까운 이웃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는 당시 UCLA의 대학원생이었던 셔윈에게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써 보지 그래?”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고 한다. 셔윈은 1960년대 후반 미국의 맥락에서 원자 폭탄의 문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패권의 형성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개발된 지 20여 년밖에 되지 않은 인공물에 초점을 맞춘 학위논문을 쓰기로 한 것은 나름 용감한 결정이었을 게다. 그 이후 평생 원자 폭탄과 그것을 둘러싼 과학자들에게 쏟은 관심 덕분에 셔윈은 자신이 종종 과학사학자라는 “오해”를 받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렇듯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과학사의 관점보다는 미국사 또는 세계사의 관점에서 비롯된 저작이다. 물론 과학사는 (일반) 역사의 일부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여기서 그 둘 사이를 굳이 구분하는 것은 셔윈이 과학적 지식의 발견 및 그 응용보다는 거대한 정치, 외교, 사회의 변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20세기 초 뉴욕 유태인 공동체의 분위기와 그 안에서 매우 예민한 감성을 지닌 소년의 심리적 경험에 주목한다. 또, 오펜하이머가 영국과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참여하게 된 반파시즘 및 좌익 활동, 그리고 그가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임명되면서 1930년대 정치 활동의 경험이 어떻게 문제가 되기 시작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의 클라이맥스는 뭐니 뭐니 해도 1954년 미국 원자력 위원회의 보안 청문회와 여기에 반영된 당시 미국 사회의 반공 분위기(매카시즘)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펜하이머의 일생은 (원 저작의 부제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와 같은 빛나는 승리에 이은 오만과, 그에 따른 비극적 결말 (triumph and tragedy)이라는 서사 구조로 재구성될 수 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아마도 현대 과학사에서 가장 많은 연구가 된 인물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한 연구에서부터, 오펜하이머 개인에 관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논문과 책이 출간되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그 동안 기밀로 묶여 있던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오펜하이머 연구의 새로운 물결이 일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이와 같은 흐름이 일부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펜하이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셔윈이 25년에 걸쳐 수집한 방대한 자료에 공저자인 저널리스트 카이 버드(Kai Bird)의 글재주가 합쳐진 결과였다. 이 책은 2006년 퓰리처 상 전기부문을 수상하며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다른 연구들과의 차별점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차별 점은 오펜하이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그의 어린 어린 시절을 성공적으로 재구성해냈다는 점이다. 오펜하이머는 부유하고 세속적인 유태인 가정에서 자라나 진보적 교육을 추구하던 윤리적 문화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보통의 아이들과는 어딘가 달랐고 그 때문에 동료들 사이에서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가 14세였을 때 여름 캠프에 참가했다가 아이들 사이에서 고자질쟁이로 지목되어 두들겨 맞고 발가벗겨진 채로 얼음 창고에 밤새도록 가두어 두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는 캠프 교사들에게 말하는 대신 몇 주 동안 버티는 편을 택했다. 영특했지만 병약한 오펜하이머는 대학에 진학하기 직전 찾은 뉴멕시코 고원 지대에 매료되었고, 그곳에서 경험한 (말 타기를 비롯한) 야외 생활을 통해 보다 강인한 신체와 정신을 갖게 되었다. 십대의 오펜하이머에게서 보이는 자존심과 고집, 금욕적인 성품, 그리고 뉴멕시코에 대한 사랑은 후일 반복해서 나타나게 될 것이었다.
화학 전공으로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오펜하이머는 당시 많은 미국 학생들이 그랬듯이 유럽으로 향했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지도를 받고 싶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J. J. 톰슨의 지도하에 실험물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성정은 꼼꼼한 물리학 실험과 맞지 않았다. 결국 영국에서 2년 동안의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난 후인 1926년 독일 괴팅겐 대학교의 막스 보른의 학생으로 옮기면서 이론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되었다. 이때부터 오펜하이머의 지적 능력이 빛을 발하게 된다. 그는 불과 1년 반 만에 학위 과정을 마치면서 무려 십여 편의 논문을 출판했다. 당시 독일의 물리학계는 소위 양자 혁명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고, 오펜하이머는 그 과정에서 보른-오펜하이머 근사를 비롯한 몇 가지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당시 그와 함께 연구하던 동료들 중에는 나중에 독일 원자 폭탄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해 볼프강 파울리, 폴 디랙, 엔리코 페르미, 에드워드 텔러 등이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유럽에 비해 뒤떨어져 있던 미국 물리학계에서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다. 그는 여러 학교의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분교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한 학기씩 강의하기로 하였다. 새로 정착한 미국 서부에서 오펜하이머는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새로운 학파를 만들어 나가는 한편, 당시 미국 지식인 사회에 유행하던 좌익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 오펜하이머의 연인이었던 진 태트록,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와 그의 아내 재키,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하콘 슈발리에, 그의 부인이었던 키티와 그녀의 첫 남편이었던 조 달레트 등은 모두 공산 당원이었거나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과의 관계는 모두 나중에 오펜하이머를 공격하기 위한 빌미가 되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 역시 공산당에 가입했을까? 이 질문은 1954년 원자력 위원회 보안 청문회의 쟁점들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해 셔윈은 확실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증거를 잡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주변 지인들의 증언들 역시 이 결론을 지지한다.
미국에서 원자 폭탄을 만들기 위한 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1942년 초의 일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담당자였던 육군 준장 레슬리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의 좌익 활동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프로젝트의 과학 총책임자(Scientific Director)에 임명했다. 리더로서 오펜하이머의 능력은 예상외로 탁월했다. 그에게는 수많은 정보를 처리해 올바른 결정으로 이끌어내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는 우연찮게도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 부지로 오펜하이머가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뉴멕시코 고원의 로스 앨러모스를 선택했다. 프로젝트는 시작된 지 약 3년여가 지난 1945년 여름 원자 폭탄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고, 7월의 시험을 거쳐 8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원자 폭탄의 성공적 투하에 이은 일본의 항복으로 오펜하이머는 미국 과학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영웅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새롭게 얻은 사회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이 엄청난 무기를 평화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펜하이머는 “국제적 통제”를 위한 기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핵 독점 국이라는 지위를 전후 외교에 이용하려는 미국 정치가들의 의도에 밀려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후 1949년 소련이 핵 실험에 성공했고, 그 이후 에드워드 텔러를 중심으로 수소 폭탄을 개발해 미국의 핵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텔러의 계획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이는 1954년 보안 청문회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를 둘러싼 원자력 위원회 보안 청문회는 널리 알려져 있다. 헤이나르 키프하르트라는 독일 극작가는 청문회 녹취록을 기반으로 연극을 만들어 상연할 정도였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오펜하이머 청문회는 자존심과 고집, 속임수와 배신, 영웅의 몰락 등의 여러 극적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 셔윈과 버드는 녹취록과 인터뷰 등의 자료들을 통해 청문회 장면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미국의 영웅은 청문회를 통해 완전히 발가벗겨져 국가 안보의 “위험 요소”라는 낙인을 얻게 되었다. 청문회가 끝나고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는 취소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모든 원자력 관련 논의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버지가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리로부터 배제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버진 제도의 세인트존 섬에 집을 짓고 몇 달씩 유배 생활을 자처하기 시작했고, 1967년 2월 18일 오랜 줄담배의 습관에서 온 후두암으로 62세의 비교적 짧은 생을 마감했다.
셔윈과 버드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한 인간과 그가 살아온 사회적 배경을 성공적으로 재구성해 냈다. 하지만 전기(biography)라는 장르가 과학사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과학이란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보았을 때, 한 사람의 일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 효과적인 방법인가? 게다가 오펜하이머는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또는 플랑크처럼) 탁월한 과학적 업적보다는 과학 행정가로서의 행적이 보다 중요한 인물이 아니던가? 이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막스 플랑크 평전』에 공통적으로 던져 볼 수 있는 질문들일 것이다. 셔윈과 버드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20세기 전반에 걸친 과학적, 사회정치적 격동기 속에서 과학 활동과 과학 행정을 수행하는 한 인간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과학기술 역시 특정한 사회정치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활동이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동전의 양면을 함께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글 / 최형섭(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 조교수)
[책대책 공개대담 초대]
일시 : 7월 17일 19시
장소 :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민음사 대회의실
신청 방법 : 기사 아래 댓글로 신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