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 캠페인

  • 특별기획
    • 인문학 가이드
    • 우리시대 인문학자
    • 책대책
    • 명사의 인문학 서재
  • 대학생 인문 독서 토론
  • 칼럼
    • 이택광의 나의 철학수업
    • 강신주의 인문학 카페
    • 정혜윤의 생각의 기쁨
    • 박권일의 소셜 맥커핀
    • 남명희의 인문학 카툰
    • 고경태의 아버지의 스크랩
  • 인문학뉴스
    • 인문신간
    • 인터뷰
  • 추천인문서
    • 인문교양
    • 철학
    • 역사
    • 심리
    • 사회
  • 희망이벤트
  • 공지사항

이택광의 나의 철학수업

나의 철학수업3 - 칸트, 사유방식의 혁명
  • 글| 이택광(경희대 영문과 교수)
  • 게재일 | 2011.05.18 조회수| 3099
칸트 이야기를 더 해보자. 앞서 말했듯이, 칸트는 ‘비판철학’이라는 것을 정초한 사람이다. 칸트 이전까지 근대철학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경험주의와 이성주의가 그것이다. 지금도 유럽의 문화는 대륙과 영국으로 구분하는데,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대륙에 딴죽을 거는 곳이 바로 영국이다. 그래서 영국의 경험주의와 대륙의 이성주의라는 대립구도가 만들어졌다.

경험주의에서 베이컨, 홉스, 로크, 버클리, 흄을 대표선수라고 한다면, 이성주의는 데카르트, 말브랑슈,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프를 대표선수로 지목할 수 있다. 영국의 경험주의를 확립한 사람은 로크이다. 로크를 읽어보면, 요즘에 들어봐도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다양한 이야기들에 대해 ‘썰’을 풀어놓았다. 로크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이성과 앎의 질료가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제는 대륙의 이성주의가 제시하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내재하는 관념’(idea innata)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로크는 모든 우리의 앎은 경험 위에 기초한다”고 말하면서, “경험으로부터 모든 앎이 그 자체로 파생한다”고 주장한다. 1)

이런 까닭에 대륙 이성주의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득관념’이라는 것은 경험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사기처럼 들릴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관념은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감각(sensation)과 반성(reflection)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로크의 관심사항은 도대체 이런 관념이 어떻게 마음에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경험 이전의 마음은 관념 같은 것과 무관한 ‘백지상태’로서 어떤 특정한 성질을 갖지 않은 공백(void)이기도 하다.

경험주의의 장점은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한 ‘해체’이다. 관념의 기원을 파고들어서 그 근본에서 관념의 형성을 추적하는 관찰이 경험주의의 핵심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경험주의는 대륙 이성주의에 대한 중요한 견제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칸트의 입장에서 이런 경험주의의 성과 자체를 부정하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찾아낸 대안이 바로 비판철학이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경험주의와 이성주의를 종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근대철학의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며 칸트는 이런 종합을 어떻게 이루고 있을까? 역시 『순수이성비판』의 서론에서 칸트는 경험주의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의 감각기관들을 건드리어 한편으로는 스스로 표상을 일으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지성활동을 작동시켜 이 표상들을 비교하고, 그것들을 연결하거나 분리하고, 그렇게 해서 감각 인상들의 원재료를 경험이라 일컬어지는 대상에 대한 인식으로 가공하게 하는 대상들에 의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면, 다른 무엇에 의해서 인식 능력이 활동으로 이끌어지겠는가? 그러므로 시간상으로는 우리에게 어떠한 인식도 경험에 선행하는 것은 없고, 경험과 함께 모든 인식은 시작된다. 2)

쉽게 말해서 ‘시간상’이라는 물리적 조건에서 본다면 모든 인식은 경험보다 먼저 일어날 수가 없고, 따라서 경험이 있어야 인식도 가능하다. 경험주의가 주장하는 것이 일정부분 옳다고 칸트는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놓고 이어서 칸트는 이런 경험주의의 전제와 다른 생각을 다음과 같이 펼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 모두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 인식조차도 우리가 [감각]인상들을 통해 수용한 것과 (순전히 이 감각 인상들의 야기로) 우리 자신의 인식 능력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출해 낸 것의 합성이겠으니 말이다. 우리는 오랜 훈련을 통해 그것에 주목하고 양자를 분리하는 데 익숙하게 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이] 추가한 것과 저 기초재료를 구별하지 못한다.

한 마디로 경험 인식이라는 것이 투명하지 않다는 말이다. 어떤 사물을 본다고 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볼 수 있는 것만 보고, 알 수 있는 것만 알 수가 있다. 아니 더 나아가서 알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칸트가 감각인상과 인식 능력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알아차리기 위해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칸트의 비판철학에 내장되어 있는 계몽주의적 기획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한편, 칸트는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인식의 존재유무는 좀 더 상세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경험을 통해 얻는 경험적 인식과 구분해서 ‘선험적 인식’이라고 지칭한다. 이 선험적 인식에서 어떤 경험적인 것도 섞여 있지 않은 것을 칸트는 ‘순수하다’고 정의한다. 말하자면 선험적 명제와 순수한 선험적 인식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칸트는 여러 가지 복잡한 논증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일일이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내가 주목해서 읽었던 것은 ‘평범한 지성’에도 선험적 인식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칸트가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선험적 인식의 편재성인 셈인데, 나에게 이런 생각은 경험주의에 대한 훌륭한 반론처럼 보였다. 칸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험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 그러그러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렇지 않을 수 없음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첫째로, 동시에 필연성과 함께 생각되는 하나의 명제가 있다면, 그것은 선험적인 판단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또한 다름 아닌 그 자신 다시금 필연적인 명제로서 타당한 명제로부터 도출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선험적이다. 둘째, 경험은 결코 그 판단들에 참된, 바꿔 말해 엄밀한 보편성은 주지 못하고, (귀납에 의거하여) 오직 가정된 비교적인 보편성만을 준다. 그래서 원래는 우리가 이제까지 지각한 한에서는, 이러저러한 규칙에 대한 예외는 없다는 정도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판단이 엄밀한 보편성을 갖는다고 생각된다면, 다시 말해 단 하나의 예외 가능성도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그 판단은 경험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3)

사실 칸트를 읽었을 때, 나를 흥분시킨 것은 이 구절이었다. 정말 섹시한 주장이 아닌가? 칸트는 경험주의를 수용하긴 하지만, 결코 경험주의자의 편을 들어주진 않는다. ‘너희들이 못 본 것이 분명히 있거든!’하고 일갈하는 의기양양한 칸트의 모습을 여기에서 떠올릴 수 있다. 칸트는 필연성과 엄밀한 보편성을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함으로써 경험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한다. 이 둘이야말로 선험적 인식을 지시하는 확실한 표지라는 입장에서 말이다.

칸트가 도입하고 있는 법학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사실문제와 권리문제의 구분을 통해 이성주의의 생득관념을 라이프니츠나 볼프가 이야기하는 ‘예정조화설’과 다른 관점에서 논증하고 있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인 셈이다. 권리문제라는 것은 합법성과 권한에 대한 문제로서, 순수 지성 개념의 기원을 파고들어서 그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경험에 ‘선험적 개념’을 적용하는 ‘권한’을 문제 삼는 것이다. 경험주의는 사실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긴 했지만, 권리문제를 사실문제로 환원시켜버리는 문제점을 노출시킨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이를 통해 칸트는 경험주의의 귀납법과 달리 객관적 실재성을 초월론적 연역으로써 증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칸트는 ‘분석판단’과 차별해서 ‘선험적 종합판단’을 내세운다. 분석판단은 선험적이긴 하지만 결론적으로 주어 개념을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반면, 선험적 종합판단은 선험적인 동시에 인식을 확대시키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판단이다. 이 선험적 종합판단이야말로, 순수 이성의 본래적 요구를 구성하는 것이다. 수학이나 자연과학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이론적 학문 안에 선험적 종합판단의 원리가 내재하고 있기에, 어떻게 이런 종합판단이 가능한지를 가늠하는 것이 순수 이성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순수 이성의 과제에 입각해서 이성 능력 일반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에서 시도하는 근본적인 기획이다.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정당한 주장을 펴는 이성은 옹호하고 그렇지 않은 이성은 제한할 수 있다는 판단의 준거를 칸트는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철학을 사실에서 권리로, 책이나 체계에 대한 평론이 아니라 이성 능력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동시켰다는 점에서 이 책은 가히 “사유방식의 혁명”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주|
1)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Oxford: Oxford UP, 1979. p. 104.
2)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역. 서울: 아카넷, 2006. p. 215.
3) 같은 책, p. 216.


목록

독자한마디 기사를 읽은 소감을 남겨주세요